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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최성룡기자 | 기사입력 2021/04/17 [15:53]

[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최성룡기자 | 입력 : 2021/04/17 [15:53]

▲ [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 편집국

 

[시사코리아뉴스] 최성룡 대표기자 = 굳건한 신념과 개척정신으로 밭을 갈고, 물꼬를 갈라 씨 뿌리는 선각자의 마음, 개척자의 정신을 지녀진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를 본지에서 어렵게 만나 보았다.

 

무수한  공예품작품들이 문화 및 상업적 가치와 국력을 키우는 원돌력이라고 말문을 여는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는 국가산업의 발전 및 국민경제 도약을 위해 연구 노력하고 전력을 경주하고 있는 미래의 개척자이다.그는 또 근면하고 진취적이며 창의적인 사람만이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미래는 스스로 노력하고 갈망하는 자에게 찬연한 빛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온화하고 침착한 성품에 매사 꼼꼼하여 빈틈이 없고 조직적인 사고와 정확한 판단력 또한 과감한 실천력이 돋보이는 인사로 일찍이 진주에서 학업을 마친 그가 이 시대 최고의 공예기술의 '금손'이라는 달인의 칭호를 받으며 활돌을 해 오고 있다. 자신이 출품한 작품에 대하여 최상의 서비스로 국가 문화의 발전은 물론 우리나라 공예 수출상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 [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 편집국


꾸밈없고 솔직하고 항상 바르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금손 김 선생(DIY작가) 김영호(세례명 라파엘 김). 무엇이든 만드는 모든 것이 금이 될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하여 얻은 별명이 금손이다.

 

그는 차분한 성격에 일처리가 꼼꼼하고 빈틈이 없으며 냉철한 사고, 정확한 판단력으로 맡은 일에 대한 계획에서 마무리까지 정확하게 추진해내고 있는 그가 현재 공예예술분야의 달인으로, 인테리어 건축일을 하고 있으며 목공예 작가, DIY 업사이클 공예 작가와 더불어 인테리어 건축가로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다정한 어머니의 섬세한 감각을 배웠기에 그의 작품속에는 사랑과 따뜻함과 강인함이 뭍어있다.

 

유튜브 채널 금손 김선생을 운영 중인 그는 오랜만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진주 인사동을 찾았다. 그곳은 그의 고향이기도 하다. 집 앞으로는 논개가 순국했다는 촉석루와 풍경이 너무도 멋진 남강이 흐르고, 고미술 화랑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언제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멋진 동네에서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촉석루의 그 넓은 뜰을 내 집처럼 뛰어놀았다고 한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며 또래 아이들 사이 착하고 총명하다고 늘 어른 들게 칭찬을 듣는 그런 아이였단다. 유수의 명문 김해 김 씨 집안에 세 1973년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건축가이신 아버지, 사랑이 많으시고 다정하신 어머니에게서 감각을 배우고 행복한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속에 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사랑과 따뜻함과 강인함이 함께 묻어있다.

 

늘 태권도와 함께했고, 죽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강인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너무도 행복하게 살았던 그의 유년시절은 중3 때 끝이 났다. 중3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집안의 가세는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그리고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온 어느 날 갑자기, 작은 매형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자 했다.

 

▲ [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 편집국

 

그날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하고, 작은 매형 뒷자리에 올라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가 나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 어머니는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 죽을까 봐 울면서 온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해주셨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딸 네 명에 아들 하나로 어머니는 그를 너무도 소중하고 모자랄 것 없이 애지중지 귀하게 키우셨다.

 

그도 어머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착한 아이였다. 한시도 땅에 내려놓지 않고 키우신 당신의 아들이 죽을세라 온 몸을 다해 간호를 하셨다. 간호하는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두 달 만에 깨어났을 때는 어머니 몸은 너무도 마르고 여위어 있었다. 쇄약 하실 대로 쇄약 해진 어머니는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셨다. 내 아들이 살고 당신을 데려가 주시라고. 마르고 움직일 수 없이 야위고 가냘픈 몸을 이끌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셨다 한다. 그리고 그가 깨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는 멀고도 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

 

내가 중3 때 아버지를, 고1 때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살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보낸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수천번 수만 번 되뇌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항상 어머니 곁에는 말없이 내가 있고, 내 옆에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살 가치가 없었다. 어머니를 따라 죽기 위해 약을 먹었다. 3일을 자고 일어났지만 아무도 그가 약을 먹은 사실을 몰랐다. 세상에는 그 아무도 그의 곁에 없는 것만 같았다.

 

외롭고 슬펐던 고등학교 시절 세월의 무게는 참으로 무거웠다. 활달하고 사교적이었던 그는, 부모님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을 잃어버렸다. 그 후, 고1 때부터 공장으로 알바를 하러 갔다. 신문배달, 우유배달, 공장 알바... 주말에 공장 알바를 하러 갔을 때, 기계에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렸다. 피가 온몸을 적셨다.

 

그 사건이 그에게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쉼 없이 불어닥친 가슴 아픈 일들.. 정신없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모두 해가며 학업을 끝마쳤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열심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마다 늘 그와 함께 한 작품 활동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자신의 작품은 그가 '힘들고 외롭고 지칠때마다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다"

 

무엇을 만들던지 작품에서는 그의 성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작품 활동을 할 때 전시되었던 작품이 꼭 전시장에서 팔리면 또 몇 개씩 더 주문을 받아 팔릴 정도다. 유년시절의 큰 시련으로 다친 마음이지만, 성인이 되어 지금의 검소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다. 지금은 사랑스러운 딸과 아들을 두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밖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집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힘이 난단다.

 

▲ [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 편집국

 

젊은 시절 4 시간씩 자고 3시간씩 운전을 하며 다녀야 했던 직장 생활 탓에 어린 시절 딸과 아들에게 아빠로서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 항상 미안함으로 남아 가슴이 아프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그의 모습인 것이다.

 

건축사업을 할 때도 이 동네 저 동네 가서 일을 할 때면 꼭 그 동네 강아지 고양이들을 친구로 사귄다. 그는 동물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귀여워한다. 그가 사랑이 많은 성격으로 자란 것은 유년시절 받았던 모친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을 물끄러미 본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든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정감 있고 사랑스럽고 강인하고.. 꼭 그를 보는 듯하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부모님을 일찍 여읜 것이 한스러워 요양병원을 하는 것이 그의 꿈이란다. 그가 만든 예술적인 작품들로 가득 채운 공간, 또 어르신들을 보면 자신의 부모님께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고, 모시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란다.

 

▲ [인물 탐방] 이 시대 공예문화예술분야의 달인 ‘김영호 금손 공예작가’  © 편집국

 

고1 이후로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가.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을 때, 걱정되어 항상 우산을 들고 나왔을 우리 어머니. 공장에서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가 깜깜한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을 때에도, 굽이굽이 기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이던가. 어머니... 아버지... 그래서 성적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큰 딸이 간호사가 된 것에 대해 그는 그렇게 기뻐했다고 한다.

 

"중3 때 아버지 고1 때 어머니를 하늘나라 간 것이 자신의 잘못 탓이라며 가슴치며 통곡했던 사춘기 시절" 


경남도내에서 공예작가로 활동하는 그는 밝고 깨끗한 상거래 질서의 확립과 상호 간의 정보교류는 물론 협조, 공예품에 대한 상업적 가지와 예술적인 문화교류를 위해 공예작가 활동을 펼쳐왔으며, 지역민들의 협력 단결에 중심적 역할을 하여 근검절약 생활과, 바른생활 실천 등에 앞장서고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선도하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공예문화예술 작가인 그는 또 서구 물질문명으로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핵가족화로 충효를 바탕으로 한 전통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극도의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로 가치전도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가정으로부터 부모공경과 조상숭배, 사랑과 예절을 가르치고, 기성세대가 앞장서 도덕성을 회복하는 사회운동이 펼쳐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근검 소박 한 생활에 만족하고, 이웃을 보살피고 돕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지역민과 더불어 따뜻한 인정을 나누고 화합 봉사하며 작으나마 스스로 덕망을 쌓는 생활로 존경받는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도 늙고 병들면 꼭 따뜻한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는 그는 원대한 꿈을 설정해놓고, 지금도 그 꿈을 실현해나가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모른다.

정론직필의 자세로 임한다.
시사코리아뉴스 회장 최성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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