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춤 역사의 인물] 一蘭.故 이필이 춤 인생 60년 드라마 같은 기적의 삶!

故 무용가 이필이선생 의 춤역사의 劃 을 긋고 떠나셨다. ......

편집국 | 기사입력 2020/09/24 [13:15]

[춤 역사의 인물] 一蘭.故 이필이 춤 인생 60년 드라마 같은 기적의 삶!

故 무용가 이필이선생 의 춤역사의 劃 을 긋고 떠나셨다. ......

편집국 | 입력 : 2020/09/24 [13:15]

 

▲ "故 무용가 이필이선생" 의 춤역사의 劃 을 긋고 떠나셨다. ......   © 편집국


[시사코리아뉴스]최성룡 대표기자 = 故 이필이선생은 미모와 知性을 겸비한 이시대 최고의 무용가이자 우리무용계의 관목하는 거목이다.이필이는 일찌기 1935년 마산 자산동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천부적인 예술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무용예술에 평생을 정진해온 경남무용의 주역이다. 이찬종 아버지와 어머니 구막이 사이에 3남4녀 중 셋째. 이필이가 태어나자 부모는‘이 아이가 딸로선 필히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생각에‘필이’라 지었다.이미 하늘은 이때부터 이씨를 택한 백성으로 삼았고 스스로 돕고 있었는지 모른다.


일제 식민 통치하의 암울했던 시대와 해방전후의 혼란 6.25전쟁의 역사적 시련기를 경험한 이필이는 타고난 예술성에 정진하며 선인들의 학문과 위덕을 계승하는 노력을 계속 해왔다.어릴적부터 명랑하고 호탕한 성격에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예지를 지녀 일찍부터 전통무용 춤 예술계 방향으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해왔으며 나름대로의 톡톡한예술 및 창작무용등을 개발하여 무용계의 일대변화를 낳게 하기도 했다.더 높은 춤의 경지와 예술의 세계를 창조해온 인사로 겸허한 자세 창의적인 자세를 견지해 왔다.


이씨은 어릴적 춤이 좋아 지금의 대자유치원자리(故김해랑선생이 춤을 마지막으로 전파한곳) 어린나이에 너무나 높은 담장 그 담장 넘어로 흘러나오는 전통가락 소리와 함께 춤추는 춤꾼들을 숨어보면서 춤을 배워야 겠다는 강한 의지를 늘 마음속에 결심을 하곤 했다.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춤꾼들의 춤사위 그리고 전통가락 소리가 흘러나오는 담장사이에 숨어 춤을 따라 하기 시작한것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모질긴 삶 울고 웃던"춤인생 60주년"을 맞이 하게 될줄이야.누가 나보고 "춤이 남편이자 나의평생 연인 이라고 했던가.유방 암 말기로 죽음 직전까지 갔었지만 암이 생명은 빼앗아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나의 춤"은 빼앗아 갈수는 없었다며 춤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전쟁 중에 이필이는 한살늦은 9살에 입학.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완월초등학교에 입학했다.당시 교사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던 시절. 담임인 여교사 우에하라는 ‘오마루가창 구니모도 히츠이(이필이의 일본이름)가 군계일학이었다고 말했다. “어미말과 아기말이 정답게 뛰노는 모습을 율동으로 하는데 우에하라 선생님이 ‘넌 무용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졌으니 무용가가 되어라’고 했던말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땐 한국춤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춤추는 시절이였다.이씨는 어릴적 춤방 담장넘으로 숨어서 배운춤이 전부였던 그가 정식 춤을 배운것은 성지여학교 1학년 때 였다. 당시 6·25전쟁이 터져 마산으로 피난 온 이미라 선생이 성지여학교 교사로 부임 최승희의 제자였다. 이미라 선생은 한눈에 이필이의 재능을 알아 보았다.그후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갔다는 이미라 선생을 만나기위해 서울을 갔었지만 못만나고 서울 낙원동에 있는 김천흥 무용연구소에서 전통무용‘포구락’을 비롯 창작무용의 기본과 북가락을 고생끝에 배웠다.


살풀이춤의 유래는 조선조 중엽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가 활발히 전개되면서부터 광대예술이 발전함에 따라 창우(倡優)들이 창작한 춤으로 보인다.살풀이춤은 경기도 지방에 전승된 김숙자류의 춤과 전라도 지방에 전승된 이매방류의 춤이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는데, 김숙자류의 춤이 섬세하고 고운 면을 가지고 있다면 이매방류의 춤은 구수하면서도 화끈한 멋을 가지고 있어서 대조적인 멋을 보이고 있다.김천흥류의 살풀이로서 다른 살풀이춤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1900년대에는 협률사(協律社), 광무대(光武臺), 원각사(圓覺社)와 같은 극장 무대에서 승무가 공연되었고 특히 승무의 무대 공연에는 한성준의 활약이 컸다. 승무는 지역마다 약간씩 특징이 다르게 전승되어 왔는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한성준에 의하여 발전된 경기(京畿), 충청(忠淸) 승무와 이대조(李大祚)에 의해 발전된 호남 지방의 승무이다. 한성준의 춤은 한영숙에게,이대조의 춤은 이매방에게 전승되었다.


내 삶의 정착에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늘 머릿속에는 오직 춤창작연구와 춤사위만을 생각하면서 성장하였다.결혼은 24살에 마산에서 했고 무용학원 제자의 엄마가 자신의 남동생을 소개. 3살 위인 남편은 미남형에 자상했지만 성격차이로 29세에 이혼할 줄이야.그러나 이혼을 요구하는 나를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혼소송 승소로 굴레를 벗어나면서 춤에만 정진 할 수가 있었다.


마산에서 57년 무용학원을 개설 68년에는 한국무용을 전파한 고 김해랑이 병석에 눕게 되는 해였다.故 김해랑의 제자인 故 최현과 이매방(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 권려성(재미무용가)의 춤도 사사하면서 이필이는“70년대 초반에는 우리 학원 제자들이 수많은 무용 콩쿠르를 휩쓸면서 당시 이화여대무용 콩쿠르에 군무 부문이 있었는데, 10여명이 저에게 지도받고 또 창작한 작품으로 많은상을 타곤 했다.당시 우리무용학원이 꽤나 명성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마산에서 무용학원을 개설하고 69년부터 17년 동안 한국무용협회 경남지부장으로 역임하면서 무용인 단합은 물론이고 수 많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육성했다. 전통무용 문화와 얼을 계승하는 노력을 계속해 왔고 경남지부장 취임이후 가진 첫 발표회는 마산 시민극장에서 했다. 이씨가 창작한 ‘뱀의 춤’, 이미라가 안무했던 1인2역의 춤 ‘선과 악’ 등이 최고의 인기였었다. 그는 창작춤 ‘회상’(71년), ‘설화’(72년), ‘번뇌’(78년), ‘사랑’(81년), ‘굴레’(86년), ‘맥’ ‘일란’(이상 87년), ‘난대별곡’ ‘사군자’(이상 2001년) 등을 안무했다. 무용극도 많다. ‘도’(2000년), ‘이성지합’(2002년), ‘성신대제’(2003년), ‘효’(2005년), ‘운림지’(2006년), ‘목련존자’(2007년) .모녀상봉지곡(2008) 이미라를 비롯해 故 최현,이매방, 권려성 등 당대 최고 무용가들의 춤을 사사했기에 다양한 창작춤이 가능했던 것이다.그녀의  춤욕심은 나이를 상상초월해 가면서 춤을 배우러 다녔다.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이매방에게 승무 살풀이춤을 전수받기 까지 하면서 춤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몸을 돌볼시간도 없이 왕성한 활동을 하던 이필이씨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지난해 경남무용계 크나큰 사건이 였다.다시는 선생의 춤을 못볼것 같은 예감 때문에 모두들 놀랐다.지난해 장순영 무용평론가는 앞으로 10년 아니20년은 거뜬히 춤을 추실분이라고 했고 "명무일란" 이필이 스승께 바치는 청정무락 제자 장순향 교수는 본인의 춤 공연장에서 이필이선생을 보고 다 들 그렇게 믿었다고 했다.당시 이씨는 지방에 벌어지는 각종예술행사 모든 공식행사 및 공연까지도 포기 해야하는 암 4기의 중환자였다.

 

그를 두고 얼마남지 않은 생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나 무용계에서는 모두들 안타까워 했다.나는 당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나의 춤 인생은 변함이 없었다.그리고 춤만은 절대로 내 몸에서 떠날수가 없어 제자들 수업을 계속 이어져 왔다.춤 때문에 체내 혈액부족으로 항암주사를 제 날짜에 맞지 못하자 당시 암세포가 폐까지 퍼져가고 있는데도 말이다.모두들 신약 덕분에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 천 운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나의병을 낳게 한분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예술인이라 직업상 불교가 더 가까웠다. 평생 불심이 가득한 그가 하나님을 영접~


내가 처음으로 간 마산 성은교회(오구식 목사)에 나가는 경남기독교신문(강학구.대표이사) 만드는 사모 김정숙씨 안내를 받아 성은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때 이씨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처음 교회 나간날이 부흥집회하는 날이였다.내가 죽음을 직전에 두고 있으니깐 교회에서 전도 하였거니 하고 따라 나갔다. 그날 부흥 집회에서 한없는 은혜를 받았다.세상에 사는 자식도 집을나갔다 돌아오면 부모가 반기는데 우주 만물의 주인인 하나님은 오죽 할까.그날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반갑게 맞이 하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역시 하나님은 살아 있구나.내가 평생을 춤 때문에 교회 한번 안 나가고 불교가 나에게는 유일한 종교이자 믿음인줄 알았는데. 이씨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면서 소망을 빌었다.


주여 하나님이 계시면 나에게 한상이라도 좋으니 뭔가보여 달라고 그리고 소원 하나를 들어주고 도와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그 기도 속에는 지긋 지긋한 항암주사의 고통과 아픔그리고 지옥 같은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 나게 해 달라는 마지막 실낱같은 구원의 기도였을 것이다.하나님은 이씨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주신 것일까.곳 바로 응답이 왔다.교회나간 첫날밤 꿈속에 하나님은 나에게 환상으로 선명히 아니 똑똑하게 보여주었다.예수님이 나타나 나의 아픈가슴에 손이 다가오면서 뭉쳐있는(암덩어리)피가 흐르는 암덩리를 3번씩이나 뽑아 내어 주는 것이였다.그리고 나의 가슴을 훌터모아주고 그 환상을 나에게 뚜렸하게 보여주는 것이였다.눈을 떠보니 거짓말 같이 정상인의 가슴으로 변해 있었고 나의가슴에 큰 혹들은 만져도 감쪽같이 없어졌다. 꿈같은 일이 있은 후 제자들에게 나의 가슴을 만져보라고 했다.


모두들 내가 암 말기라 얼마 못살고 죽을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기자양반 이필이는 하나님영접하고 암 치유되고 다시 살아났다고 신문에 소문좀 내주이소!!


지난해 11월에는 암투병중에 제자 장순향교수가 마련한 공연 ‘명무, 일란 이필이 스승께 헌무-청정무’에서 산조를 추었다. 부채를 들고 춘 ‘부채버전’과 흰 명주 ‘수건버전’ 등 두 종류를 선보였다. 무대에 선 그는 도저히 암투병 중인 무용가가 아니다. 너무 정정한 모습과 암을 극복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이날 제자들에게 보었다고 한다.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춤을 이어 올수 있는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계속 수강생들을 지도하고 무대에서 춤을 추어왔기에 암세포를 이기는 것이다. ” 나는 고통받는 환자가 아니다. 암이 별 건가! 춤 덕분에 무서울 게 없다고 했던말이 사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올해 10월9일 함안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만난 이필이선생은 제자 박기선 의 춤 "모자상봉지곡에 서 스승의 노쇠한 몸이 덩실 덩실 어깨춤을 춘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몸은 점점 쇠약해지면서 자꾸만 늙어 간다.하지만 스승이 부채를 펼치고 제자의 춤에 흥에 겨워 응답하며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 갈 땐. 아직도 남아 있는 스승의 고운 자태가 객석 가득 난 향을 풍기는 것 같았다.누가 저분이 유방암 말기를 가졌던 중한자 일거라곤  믿기지가 않았다.


이날 제자 박기선의 춤 여섯 번째 등장하는 일란(一蘭) 춤 공연에서 이필이선생은 제자를 위해 건제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일란(一蘭)은 1998년선생의 창작무 춤으로서 서울 국립극장에서 처음 선보여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춤이다. 蘭의 고운 자태는 바로 우리의 춤을 말하듯 보면 볼수록 가까이 하면 할수록 가만 가만 가슴에 젖어 뭉클해지고 그 선의 아름다움은 살아 숨 쉬고 은은한 향을 세상에 가득 채워 주는 느낌을 주는 그런 춤이다.이날 이필이 선생은 내가 춤을 준비하는중에 허리를다쳐 더 멋진 춤을 못보여 주었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암 투병생활 한지 1년이 넘은 지금의 이필이씨는 건강을 다시 찾았고 건제하다.74세의 고령인데도 젊은 사람못지않게 춤의 자태는 변함이 없다.또한 제자들에게 수업을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이필이 선생은 장순향 교수와 이순자.박기선씨를 비롯하여 전국에 수많은 人材를 양성하여 사회에 배출했다.83년개천예술제 특장부문 대통령상 수상을 비롯하여 95년 예술문화 대상등 지금까지 크고 작은 수많은 상을 수상한 경력도 화려하다..그는 지금 한국무용계 한사람으로서 긍지로 삼고 후회없는 삶과 아직도 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이필이선생은 죽음 직전에서 하나님을 영접. 거듭 태어난 제2의새로운삶을 다시 살고 있다. 춤 인생 60년을 통하여 우리 전통춤"현대무용 창작무등 꾸준한 연구는 물론이고 지금도 유능한 人材발굴을 통하여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는데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암 투병 때문에 미루웠던"춤인생 60주년"기념공연을 12월9일 마산3.15아트 대극장홀 무대에 올릴 새로운작품 준비에 70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작품연습에 열심을 다 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인생은 60부터라고 했던가.한국의 춤에서 더 나아가 "一蘭 창작무 춤"등이 세계인들도 함께 어울려 즐겨추는 춤으로 계승발전시켜 나갔으면 한다 당시 .이필이 선생은 춤인생 60주년 공연을 마치고 그 다음해 지병으로 소천하셨다.

 

▲ 故 박기선 단장" 

▲ 사진은: 故 이필이 스승의 제자  故 박기선 단장"이 자신의 춤 공연의 장면....   © 편집국

 故 박기선 단장은"당시  故 이필이 선생님은 생전 많은 제자들을 육성해 서울로 보냈다"며 "사실 마산꽃 이라면 故 이필이 선생님"이라고 자신했다. 경남 창원마산에서 "故 이필이 선생님의 재자로서 추모공연을 꼭 만들어 내고 싶다"고 했다.안타깝게 제자 박기선도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지병으로 고인이 됐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