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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의 아들 배우 김염 비운의 한류스타!

최성룡기자 | 기사입력 2018/11/13 [10:50]

‘독립투사‘의 아들 배우 김염 비운의 한류스타!

최성룡기자 | 입력 : 2018/11/13 [10:50]

▲ ‘독립투사‘의 아들 배우 김염 비운의 한류스타!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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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에 발전한 한류가 21세기에 전 세계에서 열광하고 있다. 방탄 소년 등 대한민국의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전 세계각국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몰랐던 오래전 중국을 석권한 원조 비운의 한류스타가 있다. 소년의 이름은 김염. 본명은 김덕린 그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하였지만 부친 망명을 따라 1927년 18세 소년이었던 그는 중국 상해에서 영화사 허드렛일과 엑스트라, 단역을 거치면서 1932년 개봉한 영화 '야초 한화(野草閑花)'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중국에서는 '친구로 사귀고 싶은 남자 배우 1''가장 사랑받는 남자 배우 1'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1' 등 그는 온갖 찬사를 받으며 중국 국민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아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독립투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중국에서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후 영화사에 취직한 뒤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했는데 일본 제국주의를 홍보하는 영화는 출연을 거부하고 제국주의에 맞서고 저항하는 영화는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가 가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안창호 선생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아버지 김필순을 비롯하여 고모 김순애 역시 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했고, 고모부는 '파리 강화 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이었다.

 

일제는 얼마나 김염을 눈에가시처럼 생각했을까? 제국주의를 위한 영화에 출연하라는 협박에도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였다.

 

김염은 영화를 통한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보다는 영화라는 문화 상품을 통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시아의 청년들을 대표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였다. 

 

모든 중국인이 사랑했던 영화배우.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거부한 의식 있는 공인.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원조 한류스타의 모습이자 지금 우리가  본 받아야할 인물이다.

 

일제 강정기 시절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평가받은 배우 김염은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김필순은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로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 이에 따라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김염은 고모(김순애 독립운동가 1889~1996) 고모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을 지낸 김규식 박사 집에서 성장했다.

 

어려운 생활형편 속에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며 영화에 빠져든 김염은 1927년 당시 세계적 금융 무역도시 상하에 뛰어들어 1932년 야초 한화(野草閖花)>란 영화로 스터덤에 모르고 이후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이런바·영화 황제'로 군림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였으나 공산당에는 끝까지 입당하지 않았다. 그가 출연한 영하는 대부분 항일 영화였는데, 언론 탄압은 물론이고, 일본 순사들이 상영되는 영화관 메 볼을 질러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모두 불에 타 죽은 사건도 있었다. 김염은 "배우는 부자들의 심심풀이 노리개가 아니다. 자기의 예술이 사회에 유용하도록 힘써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조국이 해방된 후 상하이에 남은 김염은 미국에서의 영화 출연 제의를 거절하면서 중국을 떠나지 않았던 그가 해방 후 중국에 남은 그는 마오쩌둥에 의해 일급 배우로 임명되고, 중국 영화작가 고위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60년 대 문화혁명 와중에는 수용소에 갇혀 중노동을 해야 하기도 했다. 그 뒤 수용소에서 나와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31273세 나이로 상하이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역사속에 잊혀져 버렸다.

 

전 중국 영화 역사상 "영화 황제"의 칭호를 들었던 단 한 사람 무용가 최승희와 독립운동가 김산 이 민족의 자랑으로 삼았던 사람 1930년 대에 주연작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영예상을 받고 뉴욕에서 까지 그의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사람.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려고 선남선녀들이 개봉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웠던 사람이다.

 

그러나 동료 영화배우였던 장칭(장청 강모택의 아내)이 주도했던 문화 대혁명 때는 커피와 버터를 좋아한 반혁명 양파 분자라 하여 철저히 배도당하기도 했던 사람, 전설적 미남 배우 루돌프 발랜티노 빰칠만한 외모를 가졌던 그 김염은 그러나 단순한 미남 배우만은 아니었다.

 

그는 영화로 항일 했던 의남 배우였고 귀골의 사상 배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 금교의 두터운 벽에 갇혀 한번 떠난 서울 땅을 끝내 다시 발지 못한 채 병고에 시달리다. 비문 하나 없이 이역에서 쓰러진 비운의 예술가였다. 만약 김염이 한국땅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면 대한민국 최초의 한류스타'라고 온 문화계가 떠들썩 하지 않았을까.최성룡기자

 

정론직필의 자세로 임한다.
시사코리아뉴스 회장 최성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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